목요일에 만나는 사람…농악(農樂)하는 마음으로
목요일에 만나는 사람…농악(農樂)하는 마음으로 |
/성공회 금산 나눔의 집 주임신부 조정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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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에 있어서 축제는 생의 기쁨을 한껏 꽃피우는 현장이다.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도 재미있지만, 높낮이 없이 모든 사람이 한데 어울리는 자리이다.
지난주까지 사무실 앞마당에서는 인근 마을에서 모인 농악단 회원들의 연습이 있었다. 인삼축제에 면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단원들뿐만아니라 응원을 하러 나온 마을주민까지 합치면 족히 오륙십 명은 되는 숫자였다.
하루 농삿일을 마치고 저녁을 물린 후 밤 여덟시 반이 넘어 다들 한자리에 모였다. 넓은 마당에서 징, 장구, 꽹과리, 북을 치며 흥을 돋웠다. 초등학생부터 중년의 아주머니들까지 어쩌면 호흡이 그리도 척척 맞는지 감탄할 지경이었다. 마을을 대표해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간식거리를 전해주었더니 고맙다며 잘 드셨다.
농악엔 음악 외에도 무용이나 연극적 요소도 가미되기에 가히 우리 고유의 종합예술이라고 할 만하다. 농악은 구수하고도 흥겨운 가락으로 공연자나 관객을 가릴 것 없이 함께 어울리며 놀 수 있다.
더불어 정식 구성원은 아니지만 놀이의 흥을 돋우려고 등장하는 사람인 잡색들도 등장한다. 민초들을 대표하여 대포수, 각시, 스님, 신랑, 양반 등이 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여기엔 종교와 세속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화합과 평화의 장이 열린다. 악기마다 캐릭터마다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흥겨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농악의 특색이다.
농악 연습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아! 저것이 우리 한민족의 저력이요, 철학이구나.”란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대사는 없더라도 다양한 소리와 춤들은 우리 민족의 참 정신을 드러내는 깊은 상징들임을 알게 되었다.
일제 또한 그것을 이미 알았기에 1937년 군수물자 헌납을 빙자하여 쇠붙이인 징, 꽹과리 등을 죄다 빼앗아 감으로 민족음악인 농악을 송두리째 말살하려 하였다. ‘한’이란 말은 ‘넓다, 크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말도 이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대표 유전자 분석을 해보면 엄격한 의미로 순수 한국인 유전자는 많은 비율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분석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한민족이란 생물학적 동질성보다는 그 말뜻 그대로 포용성을 통한 단일성에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받았고, 또 여러 민족들이 정착해 와 살았지만 모두를 받아들여 하나로 용해시킬 만큼 큰 마음바탕은 바로 이 ‘한’이라고 부르는 사상 안에서 나온다.
이것을 통해 구한말시대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래사상과 종교까지도 포용력있게 받아들기도 했다. 지금 시대에 와서는 이미 우리 주변에 이웃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이주여성들과 그분들의 자녀들까지도 하나로 포용할 저력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 넓은 마음 안에서 더이상 ‘너’와 ‘나’는 대립의 존재가 아니다. 조화와 상생의 이웃이다. 신심명(信心銘)을 읽다가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란 글을 본 적이 있다. ‘진리의 세계 안에서는 너도 없고 나도 없다’란 뜻이다. 성경(聖經)에서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상생과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우리는 더이상 둘이 하나요 한가족이란 정신은 모든 종교사상의 꽃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각자 삶 안에서 바쁘게 지내다가도 흥겨운 농악이 펼쳐지는 한마당잔치 안에서는 너나없이 기쁨으로 녹아진다. 그렇듯 농악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고, 농악하는 마음으로 이웃들을 포용하고, 농악하는 마음으로 기업을 하고, 농악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농악하는 마음으로 어려움도 이겨내는 그런 우리네이기를 축제를 맞으며 바래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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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9월 04일 (672호) |